낮술, 혹은 ‘설주(晝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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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혹은 ‘설주(晝酒)’

by stingo 2024. 8. 15.

술을 지금은 안 마신다.
그러니 가끔씩 예전에 많이 마시던 때가 생각난다.
그러면서 그런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가 궁금해지는 구석이 있다.
옛날에 좀 끄적거려 놓은 게 가끔씩 눈에 띈다.  

(낮술, 혹은 ’설주‘)
예전 기자 할 적에 낮술 많이 먹었다.
초짜땐 주로 먹혔고, 나중엔 스스로 먹고 그리고 마셨다.
선배들은 낮술을 ’설주’라고 불렀다.
그때는 왜 ’설주’라고 하는지 모르고 마셨다.
그 이름이 그런대로 거부감이 없었고,
또 선배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설’이 주는 의미는 뭐랄까,
말로서 듣기에 좀 풋풋하면서 설익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 마셔도 그렇다. 뭔가 부-웅 떠서 마시는 것 같은.
낮술은 대부분 임시적인 술자리다. 퍼지고 앉아 마시는 술자리가 아니다.
말하자면, 궁뎅이 퍼질고 앉아 마르고 닳도록 마시는
곰삭아지는 술자리가 아니고,
설익고 산란스런 술판이 낮술의 분위기다.
그런 점에서 ’설주’의 유래가 어떻고 그게 무엇이든,
그 나름으로 낮술에 합당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그런 분위기는
애시당초 나에게 낯설은 것이었다.
나는 원래 낮술에 약했다. 그 술에 잘 갔다는 얘기다.

어째됐든 ‘설주’ 한잔 - 그것이 특히 소주라면 - 의 맛은
약간 덜익은 포도맛 이었다.
그 포도맛이 좀 진하게 느껴지면, 나는 그날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그런데 ‘설주’가 참 곱살맞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백수가 되면서 부터다.
혼자 어두운 골방에 들여 박혀 일하니 容手가 하애지는,
말 그대로 ’白手’생활의 낮술은 내가 나를 만나는 통로가 됐다.
그러다 스스로의 기분 만으로 세상을 보고 만나는
또 다른 통로가 되기도 하고.
집에서 마시는 낮술의 기운이 세지면,
종로로, 마포로, 광화문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즈음의 ’설주’는 좀 어색하고 낮설다.
한동안 낮에 집을 비웠기 때문이다.
다시 어둔 방을 꿰차고 있자니,
낮술, 아니 ’설주’가 다시 나를 반긴다.
오늘은 소주 한 석잔 마셨다.
한참 늦은 점심격인 상추쌈과 된장국, 그리고 오징어젓갈이 안주다.
마실 땐 진수성찬에 꿀맛이었는데, 지금은 좀 허전하다.
광화문으로 나가야 하나…
(2010년 8월 어느 날)





#낮술#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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