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 폐쇄적인 북한을, 일방적인 선전도구일 망정 북한의 대외적인 측면에서 그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창구는 로동당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로동신문>이었다. 나는 이 신문을 1976년 대학에 복학해 졸업논문을 쓰면서 처음 보았다. 그 때는, 지금은 안 그렇겠지만, 이 신문을 보기가 엄청 까다로웠다.
나는 그 때 국토통일원에 가서 몇몇 과정을 거쳐 이 신문을 접했는데, <로동신문>을 보면서 느낀 첫 인상은 당혹감이었다. 폐쇄적인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라는 선입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신문이니까 최소한 일반적인 관점에서 공유되는 기본 프레임은 갖추고 있는 줄 알았지만, 처음 접한 <로동신문>은 이런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신문이 아니라, 선전삐라 같은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김일성 사상이나 당의 강령을 주입시키기 위한 선전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로동신문> 이었다. 나는 당시 '북한의 언론구조와 그 실태'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로동신문>을 통해 북한의 이른바 언론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일터 또한 <로동신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는 곳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내가 그 일터로 들어간 것 또한 내 졸업논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고, 그래서 거기서 <로동신문>을 매일 보면서 일을 했다.<로동신문>의 영문판이라 할 수 있는 게 <The Pyongyang Times>다.
나는 입사 4년 후 국제부로 가 영문저널 제작과 편집 일을 하면서부터는 <평양타임즈>와 더불어 지냈다.
<로동신문>과의 인연은 또 거기서도 이어진다. 인연이기는 하지만 악연이었다. K신문에 다니는, 알고 지내는 선배가 있었다. 이 선배는 당시 모 언론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용건을 말하는 게 이랬다. 대학원에 페이퍼 제출할 게 있는데, 긴요한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로동신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더러 어느 일정 기간의 <로동신문>을 좀 보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럴 수 있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 일정 기간이 문제였다. 그 때가 1982년이었는데, 그 해 9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열흘간 김일성이 중국을 공식 방문한 그 기간의 <로동신문>을 보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보는 걸 조건으로 보게해 주겠다고 하고 자료실에 내려가 그 기간 분의 신문을 가져다 주었다.
자료실에서 그 기간 분의 <로동신문>을 챙기면서 나는 그 때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자료실 직원에게 내가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며 문의했더니 맞다고 했다. 그것은 <로동신문>이 김일성의 그 때 중국방문을 계기로 지면을 4면에서 6면으로 증면하면서 처음으로 컬러판을 발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김일성의 10일간 중국방문을 다룬 <로동신문>은 원래 4면에다 2개면의 컬러화보를 담은 10일치 분량의 것으로, 총 60면에 달하는 것이었다.
그 신문을 가져다 나는 선배에게 보라며 주었고, 선배는 내 사무실 책상에 자리를 펴놓고 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선배는 열심히 신문을 보며 필요한 부분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선배는 그 때가지도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선배에게 내일 다시 와서 보시라고 했다. 선배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이 신문들 집에 좀 가지고 가서 보면 안 되겠느냐. 가당치 않은 요구였다. <로동신문>은 당연히 불온물이었고, 그것을 지정 장소 외로 반출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사안이었다.
안 된다고 했다. 선배는 그럼에도 자꾸 졸랐다. 그냥 집에 갖고 가서 내일 아침에 갖다 놓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것이다. 선배랑 그 문제를 놓고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그리고 선배와 사무실을 함께 나왔다.
그리고 둘은 충무로로 내려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좀 마시다가 비교적 일찍 헤어졌다.
그 다음 날 그 <로동신문>이 없어졌다. 잃어버렸는지, 없어진 것인지, 아무튼 없어졌다. 그 과정을 얘기하기는 복잡하다. 언젠가 얘기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아직 그 얘기를 하기에는 시점이 적절치 않다.
아무튼 <로동신문>, 그것도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사상 처음 컬러로 대서특필한 10일치 신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때는 전두환 정권의 초창기, 정권의 합법성 내지 정통성과 관련해 북한에 관계된 대공용의 사안에 철퇴가 가해지던 엄혹한 시기였다.
나는 즉각 회사 측에 의해 안기부에 신고가 됐다. 안기부 조정관이 회사에 나와있던 시절이었다.
안기부 수사국 수사관 두 명으로부터 나는 수사를 받았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운이 좋았다.
내가 하던 업무는 회사 자체가 그랬지만, 대외적 차원의 대북심리전의 일환이기도 해서 안기부 간여를 받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안기부 차원의 조사였다면 나는 감찰실 수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아마도 나는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나는 외부인 수사의 수사국 수사를 받게돼 감찰실 수사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남산이라는 곳을 그 때 서너 번 가서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대공용의점이 없다는 알리바이가 어느 정도 먹혔다. 일면식도 없던, 당시 중국문제에 정통한 장공자 박사를 들먹이기도 했는데, 장 박사 그 분이 그걸 인정해 주는 바람에 내 알리바이가 성립이 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중국 인명의 영어표기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김일성이 중국서 만나는 많은 중국 관료들의 이름을 영문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걸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장 박사 할 수 있었었기에 영문저널을 만들면서 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게 인연이 됐던 것이다.
두어 달 간의 수사 끝에 나에게 처분이 내려졌다. 감봉 3개월에 차장진급 1년 누락이었다. 나는 1983년 1월에 차장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게 1년 누락이 된 것이다.
내 얼굴이 들어간 전단이 전국의 대공기관에 참고용으로 배포되기도 했다. 나는 그 전단을 남산 수사실에서 보았다. 그 자리에서 한 수사관이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로동신문> 10일치가 통채로 없어진 것은 보안관련 사건 사상 유례가 없는 대공사건이라는 것.
선배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질 않았다. 당연했던 게 나는 수사과정에서 선배를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사라졌던지, 잃어버렸던지, 하여튼 없어진 그 <로동신문> 10일치 신문은 그 후 나타나질 않았다.
0… 가끔씩 이런 꿈을 꾼다. 미행 당하는 꿈. 옛날에 겪었던 어떤 일이 내 잠재의식에 그런 꿈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엊저녁에도 꿨다. 내가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누가 나를 따라붙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 때 순간적으로 그 미행자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갈 길을 계속 걸어갔고, 그 자도 계속 나를 따라왔다. 나는 언덕길을 오른 후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오다 오른 쪽 허스름해 보이는 길거리 다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았는데, 미행자로 보이는 자가 그 얼마 후 다방에 들어왔고, 나는 그 자를 본 후 바로 자리에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미행하는 걸 확인한 것이었기에 더 이상 다방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다방문을 열고 나가려니까, 다방 마담이 별 좋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막 들어선 미행자 그 자는 내 곁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는 그 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미행자 그 자의 왼쪽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손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 그 반지를 보는 순간, 나는 이 미행자가 3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파란색 보석이 끼워진 노란 임관 금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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