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거기
붙박혀 움츠려 있음은
오가는 흰구름 따라 눈길 보내거나
매서운 칼바람에 옷깃 여미거나
꽃 피고 지고 새 울어서
단풍 물들어서
흐르는 시간으로
그냥 흘러가는 것들 내버려두는 뜻은 아니다
그대 거기
그냥 주저앉아 있음 아니다
타박타박 그대 외로움 세상을 밟고 간다
(이 성부 '숨은벽 3')
북한산 '숨은 벽'을 마주하고 보면 숨이 턱 막힌다. 거대한 장벽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길이기도 하다. 숨은 벽을 오르면 곧장 백운대로 이어진다.
슬랩 아래로 우회해서 백운대로 오르는 길도 있다.
그러나 슬랩이 그냥 두지를 않는다. 손짓을 한다. 나를 한번 타 보아요 한다.
이십 년도 훨씬 넘었다.
어느 해 늦은 가을날, 숨은 벽을 올랐다. 믿을 것은 오로지 손가락과 신발이다.
구부린 채 다섯 손가락으로 바위를 집고 올라가야 한다.
신발은 스텔스 밑창으로 무장한 '파이브 텐' 암벽화.
그 때는 지금처럼 슬랩에 로프도 걸쳐놓지 않았다.
한번 스타트해서 그냥 뒤돌아보지 말고 오르라는 게, 당시 우리 김영호 산행대장의 당부였다.
시킨 그대로 올랐다. 숨 한번 크게 몰아쉬고 올랐는데, 다음 숨 쉰 기억은 없다.
말 그대로 한숨에 올라야 하는 곳이 숨은 벽이다.
슬랩을 다 오르고 비로소 아래로 내려다 본다. 저기를 내가 올라왔다는 성취감, 그리고 경외감.
그 해 늦 가을, 숨은벽의 단풍은 피빛처럼 붉었다.
붉디 붉은 단풍이 바람에 낙엽되어 흩뿌려지고 있었다.
백운대로 이어지는 암릉으로 붙어 올랐다.
붙어있는 아슬아슬한 바위 길로 우수수 바람이 지나가니, 퍼뜩 죽음의 그림자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다음 주에 한번 더 올랐다. 그리고 숨은 벽에 완전히 빠져 들었는데, 그 것으로 그만이었다.
우리의 김 대장이 먼 곳으로 이민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 후 김 대장 없는 숨은벽은 오를 수도 없고, 오를 마음도 없었다.
언제 김 대장과 다시 한번 오를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현실로 다가오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그걸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mem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기 '친구' (0) | 2020.09.10 |
---|---|
靑巖寺 단상 (2) | 2020.09.10 |
대청봉(大靑峰) 보름달 (0) | 2020.09.09 |
추억 속의 노래, '아네모네' (0) | 2020.09.07 |
북한산 '雨中산행'은 무섭다 (2) | 2020.08.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