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이른바 신사화(紳士靴)라는 구두를 신어본지 꽤 됐다.
1998년 신문사를 나와 백수생활을 한 이래 주로 캐주얼화 아니면 운동화,
그리고 등산화를 신고 다녔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이 혼사에 가려면 양복에 그 구두를 신어야 된다고 해서
쳐박아 놓았던 구두를 꺼내 단장을 했다.
돌이켜보니 얼추 5년 만에 꺼내 본 구두다.
2016년 정월에 모 신문사 아르바이트 면접이 있어,
이 구두를 사 신고 그랬으니 그만한 연륜의 구두다.
그 때 몇번 신어 본 기억이 있는데, 그러고는 현관 신장에 내버려 뒀던 구두다.
먼지가 덕지덕지한 그 구두를 꺼내보니 몇번 신지 않았는데도 보기에 뒷굽이 좀 달은 것 같다.
그 상태로 신으면 마누라가 또 뭐라뭐라 할 것이다.
어제 가산디지털단지 치과 가는 길에 수선집에서 '반달굽'으로 땜빵이를 하고 약칠도 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어느 새 구두가 말짱해 졌다.
그 구두를 신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어째 좀 어색한 게 내 신발 아닌 느낌이 든다.
하기야 이런 구두 신을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 양복 입을 날도 몇날 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본 윤흥길 소설 중에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구두를 주제로 한 중편이 있었다.
그 소설에서 구두는 융통성 없이 사는 주인공의 자존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빈한한 처지이면서도 많은 구두를 모아 반짝거리게 닦아놓고 몰래 보관을 하는...
구두에 그런 의미를 준 주인공과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기억에 어렴풋하지만,
당시 내 처지와 견줘지는 게 다분해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소설이 문득 떠 올려지는 건, 그 소설 속 주인공의 특별한 구두와 문득 내 앞에 나타난
내 구두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은데 별 의미없는 짓거리였다.
하기야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구두를 중히 여기는 게 꼭 구두라는 物性에 집착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든다.
구두, 하니까 그에 얽힌 애기꺼리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과 구두를 바뀌 신었던 얘기다.
6년 전, 인사동에서 각자들의 모임 뒷풀이를 끝내고 나오면서 어떤 분이 내 구두를 신고 먼저 가버렸다.
나는 내 신발을 찾으려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식당 주인의 연락으로 어떻게 그 분과 용케 연락이 됐다.
구두를 바꾸기로 하고 그 식당에서 그 분을 만났더니,
미안하다면서 사과의 의미로 맥주 딱 세병만 사겠다고 했다. 왜 딱 세병이었는지,
그때 그 이유를 그 분으로부터 들었는데 지금 기억에 없다.
맥주 세병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도 맥주를 샀고 그렇게 해서 둘이서 좀 마셨다.
각자 자기 구두를 신고 헤어졌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 분에 관해 알게됐다.
그 분은 故박인환 시인의 아드님이었다.
구도를 매개로 적잖은 얘기를 나눴는데, 역시 시인의 아드님 다운 위트와 유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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