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 대한 만행적인 범죄의 책임을 묻는 단죄는 그 공소시효가 없다.
히틀러의 나치독일 만행에 대한 책임추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 등 그의 추종자들은 장본인들로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처형 등 단죄를 받았지만,
그 하부에서 부역한 자들에 대한 단죄도 예외가 아니다.
20일 영국 가디언(The Guardian) 紙의 한 보도는 이와 관련한 것이다.
이름가르트 프루히너(Irmgard Furchner). 듣기에 아주 생소한 한 여자의 이름이다. 나이도 올해 96세다.
이 할멈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살인 등 나치독일의 만행에 가담한 혐의로 법정에 세워졌다는 보도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푸르히너는 피고인 신분으로 독일의 이체호(Itzehoe) 법정에 들어섰다.
스카프와 선글라스, 마스크로 철저히 얼굴을 가린 채였다.
프루히너는 1943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슈투트호프 강제수용소에서
파울 베러너 호페 사령관의 비서 겸 타자수로 일하며 약 1만1000명에 대한 살인 등
잔혹 행위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있다.
폴란드 그단스크 인근에 1939년 세워진 나치독일의 슈투트호프 수용소는
1945년까지 약 6만5천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희생된 장소다.
이날 공판은 당초 지난 달 30일 열린 예정이었지만, 푸르히너가 재판 직전 도주를 시도하면서 연기됐다.
당시 프루히너는 자신이 사는 양로원을 나와 함부르크 시 외곽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5일 만에 전자팔찌 착용 뒤 풀려났다.
가디언은 "재판이 시작되고 푸르히너는 단지 이름과 주소, 그리고 자신이 과부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었고 다른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프루히너의 재판과 관련해 관심을 모으는 건, 그녀가 과연의 자신의 죄업을 인정하냐 마냐의 여부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 2017년 107세의 나이로 사망한,
히틀러의 핵심참모로 나치독일의 선전상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여비서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의 케이스 떠올려진다.
종전 무렵 히틀러의 베를린 벙커에서 용케 살아남았던 폼젤은 평생을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침묵으로 살아오다 100세가 되던 2010년에 돌연 태도를 바꿔 자신을 세상에 알린다.
폼젤이 괴벨스의 여비서 겸 속기사였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고,
그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와 그녀의 전기와 인터뷰 구술을 정리한 책<어느 독일인의 삶>도 출간된다.
폼젤은 하지만 괴벨스의 비서로서 나치의 만행에 부역한 죄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나는 괴벨스의 사무실에서 타자기를 두드렸을 뿐이다."
폼젤이 자신에게 대두되는 나치독일 만행의 죄과에 대해 한 말이다.
말하자면 폼젤은 "나는 직장와 직장인으로서의 의무감. 소속감 등 일상에 충실했을 뿐"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폼젤의 이러한 입장과 주장은 나치 최대의 전범이자 유대인 학살자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예루살렘 재판에서 시종일관 취한 입장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아히히만의 재판을 방청한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나치독일 최대의 전범 아이히만의 자신의 죄과에 대한
이런 태도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eil)'이라는 말로 규정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나치독일의 부역자라는 걸 강력히 부인한 폼젤의 태도도 아렌트의 이 규정에 어느 정도 들어 맞는,
아니 더 나아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폼젤이 아이히만과 달랐던 점은, 폼젤은 죽기 전 자신의 상전인
괴벨스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괴벨스가 세계인류에 한 일이나,
그가 히틀러 벙커에서 자기 자식들을 살해한 사실은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폼젤과 프루히너, 둘 다 모두 100세를 넘기거나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
자신들의 행위에 단죄를 받았거나 받고있는 것이다.
이들이 종전 후 지금껏 오래 살아오면서 양심상 자신들의 과오를 과연
나몰라라 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온전했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끈질기게 연명해온 삶이었을지 모른다.
프루히너가 재판에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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